쏟아져내린 서랍



공중의 색깔을 닮아가는 계절은 이슬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 쓸쓸한 여운 속을 걸어나오면 외 날개로 날아다니는 작은 새의 몸짓 같은 것들이 구겨진 안감을 흠뻑 적시곤 한다 아침이 찾아와도 돌아서지 못하는 별 하나 날마다 나의 창에 흐를 것이다 남자는 다락문 두드리는 소리를 간신히 이불로 덮는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하얀 리듬 블루노트*가 붉은 색을 찍어 파랗게 칠한다 두 손 모은 아리아를 타고 투명한 나비가 너울너울 춤을 춘다)

어느 가을 뜨락에서 마른 햇볕 한 장이 가장 낮은 목소리로 수의를 입고 있었다 빈 손을 가진 코스모스가 하얀 미소를 주고 갔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 불끈 쥔 주먹들은 손이 많아 거미줄에 걸려 있다 우선 근육을 잘라 몸에 고인 흉터를 태워야 한다 손이 투명해지면 물빛이 딱딱해진 것이므로 새로 찍은 사진에는 내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살아서도 은빛 나비처럼 훨훨 날았으면 한다

(객석에서 북소리가 울리고 게리 무어*의 기타가 손톱을 키운다 소의 뿔이 마타도르*를 향해 합창을 겨눈다)

봄 꽃나무 옆에서도 가을을 거닐며 희미해져가는 나의 사랑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에서 차가운 햇볕을 온몸으로 걷어내는 걸 아시잖아요 마지막 잎새를 친친 묶어 가느다란 동맥에 붙잡아매는 걸 보셨잖아요 백발을 허공에 담근 노부부가 다정하게 두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요 작은 아파트를 바라보며 꿈을 얘기할 때와 똑같은 눈빛으로 말하는 걸 들으셨잖아요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얼음밖에 없잖아요 남자는 다락문에서 쏟아져내린 서랍을 주섬주섬 모아 모닥불꽃 속으로 밀어넣는다 물레타* 속으로 연기가 빨려들어간다 마타도르의 검이 소의 목을 뚫고 들어간다

한식 날 환갑을 바라보는 반백의 남자와 노모가 어느 지하철역에 서 있다 뗏장에 물을 넉넉히 부어주었으니 잘 자랄 거구먼 살아생전에 깔끔한 걸 좋아하는 성품이었으니 애미도 기분 전환은 되었을 게야 그나저나 어디 말동무라도 할만한 처자가 있으면 이제 재가를 해야지 10년이구먼 그만하면 되었다네 상우 애미네 도착하면 전화함세 노모가 잔뜩 쪼그라든 키에 맞춰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에 오른다 남자는 소실점을 향해 사라져가는 지하철을 진눈으로 바라본다 돌아서는 발걸음에 또 하나의 수의가 걸려 있다 지하를 겨우 발로 밀어 지상으로 올라간다 지하철표지판이 자꾸 묘비명으로 읽힌다 가벼워지세요 남자의 어깻죽지에 남아 있던 날개 하나마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이슬 속에서 작은 새가 기우뚱기우뚱 걸어간다

(음표 없는 암전이 흐른다)






*블루노트[ blue note ]: 재즈나 블루스에서는 3음(미)과 7음(시)을 반음 낮춰 연주하는 독특한 형태를 취하는데, 이 음계가 블루노트이다. 5음(솔)을 반음 낮추기도 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로버트 윌리엄 게리 무어[ Robert William Gary Moore, 1952.4.4 ~ 2011.2.6 ]: 영국 북아일랜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블루스 기타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며 40년간 활동하였다. 대표곡으로 ‘파리지엔 워크웨이즈’, ‘스틸 갓 더 블루스’ 등이 있다.

*마타도르[ Matador ]: 투우 경기 때 최후에 등장하여 소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투우장의 주역'이라는 의미이다.

*물레타[ muleta ]: 투우에서, 투우사가 사용하는 막대에 매단 붉은 천을 말한다. 투우사가 황소를 자극해 돌진하도록 유도하며, 그렇게 체력을 소비시킨 뒤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순간을 노린다.